조각글) 잡념 습작

* 글 쓰기 좋은 질문 624 中 164번 질문.
  "작가들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어떤 느낌일까? "를 보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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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거칠게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의 공기를 흩뜨려놓는다. 벌써 몇번째일까. 구겨진 종이가 땅에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귀가 이제는 익숙해진듯, 이상 소리가 거슬리지도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다. 신경은 온통 예민해지고 있다. 이제는 없는 짜증이 종이가 구겨지며 내는 소음때문인지, 차게 식어버려 텁텁한 맛만 남아버린 커피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니. 아니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변명할 기력마저 사라졌다. 나는 누구보다도 짜증의 원인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다. 채워지지 않는 종이. 거대한 하얀 여백이 지금 나의 목을 조르고 있다. 마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머릿속엔 마치 앞의 종이처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아니. 틀리다. 머리는 어떤때보다도 온갖 잡념으로 가득 차있다. 짜증, 초조함, 자신에 대한 분노, 현실도피, 이미 수백번 돌려본 원고의 부분, 출판사 담당자의 얼굴, 이제까지 출간됐던 수많은 책의 표지들, 내용들, 평가들, 작가로서의 명성, 주위의 기대, 그리고 그로 인한 부담감. 수많은 생각과 감정 속에서 나는 종이를 채워줄 줄의 영감을 찾아내야 했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잡념의 바다 속에서 멀쩡한 하나 없이 쓸려내려가는 영감의 조각배를 해안가로 끌고 와야하는 일이다. 실제로 며칠간, 원고에는 한줄의 제대로 문장도 안착하지 못한 바닥에 구겨진 종이들만 쌓여가고 있지 않은가.
  아니. 침착하자. 이럴 때일 수록 머리를 식혀야 한다. 좋은 글이 나오기 위해서 작가에게는 무엇보다도 여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여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오히려 부담과 초조함으로 돌변해 나의 머리를 세게 쳐댄다. 귀가 웅웅 울린다. 이미 극도의 스트레스로 심신은 모두 지쳐있다. 나름 여유를 되찾을 요량으로 이미 차가워진 커피잔을 집어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따뜻한 커피를 채우려다 커피잔을 그대로 싱크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덜그럭. 커피잔이 싱크대에 부딪쳐 내는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이상 골방에 틀어박혀 똑같은 커피만 마시는건 하고싶지 않았다.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단 외투를 집었다. 주머니에 핸드폰과 카드를 쑤셔넣은 도망가듯 바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마치 근처 카페에 앉아 새로운 커피를 마시면 영감의 나룻배가 자연스럽게 해안으로 당도할 처럼. 물론 어떤 카페를 찾아 들어가도 나의 주문은 항상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동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이상 가만히 잡념의 바다에 침식되고싶지는 않다.
  길거리에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온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이렇게 여유부릴 시간이 없는데.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의 원고는 아직도 하얀 여백으로 가득한데. 다시금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멈추었던 발이 향한 곳은 집이 아닌, 길거리에 위치한 프렌차이즈 카페였다. 나는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뱉어내느라 북적이는 카페의 문을 열어제쳤다. 귀로 소음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보다, 구겨진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보다, 찻잔이 싱크대에 부딪치는 소리보다 훨씬 크고 소란스러웠음에도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페의 앞에서 잠시 멈춰 눈을 감고 소음을 음미해본다.
  잡념의 바다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칠게 나룻배를 밀어내던 파도는 방향을 바꿔 나룻배를 해안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아주 부드럽게. 눈을 뜨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오늘은 조금 부드럽고 달달한 커피를 시켜볼까. 변덕을 부려보기로 했다. 변덕이 작고 초라한 나룻배에 돛을 달아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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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데에 걸린 시간: 약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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